My Way Your Way


꿈을 포기하지 않다

vol.1

패럴림픽에 거는 마음

아키야마 리나(26세, 도쿄) 2013. 11

2013.09.06

©安藤理智/スタディオアフタモード

2004년 아테네 패럴림픽 배영 100m S11 등급*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아키야마 리나 씨. 2008년 베이징 대회 때는 S11 등급의 배영 100m 종목이 폐지됐었으나 2012년 런던 대회에서 다시 부활해, 아키야마 씨는 오랫동안 소망해 왔던 금메달을 획득했다. 현재 일반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아키야마 씨가 패럴림픽에 모든 것을 걸었던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력이나 시계의 정도에 따라 S11~S13 등급으로 나뉜다. S11은 시력을 거의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의 등급.


패럴림픽의 압박감

런던 패럴림픽에서 배영 100m 예선을 마쳤을 때, 컨디션이 최악이었어요. 결승전에는 진출할 수 있었지만, 기록을 듣고 엄청 울었습니다. 「이래 갖고 어떻게 메달을 따? 금메달 선언까지 했는데 금메달은커녕 빈손으로 돌아가게 생겼어. 지금까지 해 왔던 게 다 끝장 나는 거 아냐?」 하는 생각에 불안하고 무섭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고 해서 눈물이 쏟아진 거죠. 다 울고 나서는 한참 동안 바람 빠진 풍선 같았어요

런던에 도착할 때까지는 컨디션이 최고여서, 이대로 가면 세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했었거든요. 그랬는데 선수촌에 들어가 경쟁 상대들을 만나니 너무 너무 무서운 거예요. 밤에도 악몽에 시달리고....... 두 달 전 국내 대회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운 뒤, 처음으로 쫓기는 입장이 돼서 나가게 된 패럴림픽이었던 거죠. 금메달 선언을 한 것도 처음이었고요. 그런 것들이 모두 압박감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나 금메달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진짜 아무 색깔이나 좋으니 메달만 따면 좋겠다 싶었죠.

예선이 끝나고 결승전까지는 약 8시간 남아 있었습니다. 선수촌에 돌아와 식사를 하고 몸 관리를 받았어요. 그때 트레이너가 「너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는 말을 해 주었어요. 그 말을 듣자 「이것이 마지막 무대다. 내가 세계 1위가 될 수 있는 길은 오후의 결승전 하나밖에 없다. 온 힘을 다해 열심히 수영을 했는데도 좋은 결과가 나와 주지 않는다면 그때는 할 수 없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선수촌을 나와 결승전을 향할 때는 「좋아! 해 보자!」 하는 마음이 되더군요.

온 힘을 다했던 결승전

決결승전에서 첫 번째 턴 직전에 코스로프에 부딪치고 말았어요. 보통 때 같았으면 「아이고, 부딪쳤다!」 하면서 힘이 빠지고 속도가 떨어졌을 텐데, 이번에는 달랐어요. 마지막 50m는 계속 머릿속으로 「금메달! 금메달! 금메달!」 하고 소리를 지르며 갔죠. (웃음)

터치를 하는 순간 긴장이 탁 풀렸지만,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순위를 금방 알 수 없었는데, 듣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들었고....... 약간 무섭다는 느낌도 있었어요. 「1등이야!」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처음에는 못 알아듣고 다시 물어보고,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서 또다시 물어보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승리의 포즈가 나왔어요.

한참 지나서 2위와의 기록 차이를 들었습니다. 0.12초. 「아슬아슬했네!」 싶어 식은땀이 났죠. 순위를 알았을 때 이상으로 「휴우. 진짜 다행이다.」 싶었어요.

©オフィス写真部 佑木瞬

런던 패럴림픽. 관중의 성원에 손을 흔드는 리나 씨. 앞에 가는 사람이 들고 있는 막대는 턴을 하거나 골의 타이밍을 알려 줄 때 사용한다.
©安藤理智/スタディオアフタモード

그 자리에 오기까지

처음 패럴림픽에 나간 것은 런던의 전전 대회인 아테네 대회 때였습니다. 16세 때였죠. 막 경기를 마치고 처음에는 은메달을 땄다는 사실에 좋아했는데, 시상대에서 금메달 선수의 중국 국가를 듣자 「아. 1등 하고 싶다. 금메달 따고 싶다.」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더군요.

그런데 그 다음의 베이징 대회에서는 경기 인구가 적다는 이유로 제 종목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정말 기가 막혔어요. 「왜?」 하는 말밖에 머릿속에 안 떠오르더라고요. 하지만 패럴림픽에서 꼭 금메달을 따고 싶어 자유형으로 나가기로 했습니다. 제가 싫어하는 종목이었는데, 지금까지 안 했으니만큼 더 열심히 연습하면 예상 외로 실력이 늘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웃음)

하지만 그게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었습니다. 어찌어찌 패럴림픽에는 나가게 되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금메달은 어려울 것 같아서 목표를 결승전 진출로 바꾸었어요. 그리고 결승전에 나갈 수 있게 되었죠. 결과는 8명 중 8위. 하지만 굉장히 기뻤어요. 아테네의 은메달 이상으로 기뻤습니다. 코치를 믿고서 둘이 하나 되어 정말 열심히 했기 때문이에요. 코치가 펑펑 울었다는 말을 듣고, 저와 함께, 아니 저 이상으로 열심히 했기 때문에 그렇게 기뻐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찡했습니다.

후회 없이 시상대에 오르고 싶어

베이징 대회 후에 국내 대회와 세계 대회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국내 대회 때는 세계 대회가 아니어서 그런지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어요. 세계 대회 때는 신기록을 세우긴 했지만 2위였습니다. 왜 2위였느냐? 원인은 후반의 속도 저하였어요. 파워가 떨어져 버리는 거죠. 그래서 마지막까지 체력을 유지할 수 있는 에너지 절약형 영법으로 바꾸어 봤습니다. 그런데 연습 때는 좋은 기록이 나오는데 실전에서는 안 나오는 상황이 한 2년간 이어졌어요. 터널을 계속 걷는데 끝이 안 보이는 그런 느낌이었죠. 결국은 정신력이 약했던 거였어요. 좋은 기록이 안 나오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위축이 되어 버리고 안 되는 거죠.

이젠 이번 대회를 끝으로 은퇴하자는 생각을 하면서 항상 대회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좋은 기록이 안 나오고....... 다음 대회 때는 나올지도 몰라 하는 생각에 다시 대회에 나가고, 그런 식의 반복이었어요. 그렇게 점점 은퇴를 생각하고 있을 때 제 종목이 런던 대회에서 부활하게 된 거예요. 솔직히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은퇴할 이유가 없어져 버렸잖아요.

「경쟁 상대들을 이겼을 때 비로소 세계 1위가 되는 거다. 그렇다면 역시 패럴림픽에 나갈 수밖에 없어.」 후회 없이 시상식에 서고 싶었어요. 아무리 노력했어도 결과가 따라와 주지 않는다면 아닌 겁니다. 남들은 받아들여도 저 자신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죠.

런던 대회 전에는 뭐든지 수영을 첫 번째로 생각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1등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죠. 연습도 그 이상이 불가능할 정도로 했어요. 일요일만 쉬고 그 외에는 매일 1시간 반에서 2시간씩 아침과 낮에 연습하고, 또 근육 트레이닝도 했습니다. 1년간은 매일 팔굽혀펴기, 복근 운동, 배근 운동을 500회씩 했어요.

제가 원래 경쟁심이 굉장히 강해요. 기준을 이렇게까지 높이 잡지 않는 게 살기가 편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지만, 기준을 낮춰 버리면, 그 낮은 기준조차 넘지 못하게 되면서, 점점 점점 이 정도면 됐다 싶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렇게 되면 동기부여 수준이 안 올라가거든요. 그래서 목표를 세울 거면 최고점을 지향하죠.

©オフィス写真部 佑木瞬

메이지 대학 캠퍼스의 점자 블록. 시각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흰색 지팡이로 점자 블록의 요철을 확인하며 걷는다. 요철의 종류에 따라서, 앞으로 가도 되는지 멈춰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オフィス写真部 佑木瞬

수영과의 만남

언니가 수영 교실에 다녀서 저도 3세 때부터 다니게 되었어요. 제가 굉장히 말괄량이라서 오히려 물속이 마음 놓인다 싶은 부분이 부모님께 있었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는 눈이 보이는 아이와 경쟁해도 이겼는데,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자 그러기가 어려워지게 되었죠. 팔을 휘두르는 법, 다리를 움직이는 법, 그 어느 것 하나도 보이지 않으니까 이미지를 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럴 때 담임 선생님이 여름방학 독서감상문 과제용으로 책 1권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가와이 준이치 씨의 『꿈을 잇다』였죠. 가와이 씨는 저와 같은 전맹이며 패럴림픽 메달리스트예요. 저는 이 책을 통해 패럴림픽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고, 패럴림픽에 나가는 것이 목표가 되었습니다.

세계를 넓혀 가다

중학교 때는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다닌 초등학교인 집 근처의 맹학교는 저의 학년이 저를 포함해 딱 2명이었어요. 무엇보다 친구를 많이 사귀고 싶어서 전국에서 학생들이 모이는 쓰쿠바 대학부속 맹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렇다고 해 봐야 중학교는 한 학년에 8명, 고등학교는 17명이었지만요.

초등학교 무렵부터 영어 선생님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당연히 대학에 진학할 생각이었어요. 계속해서 맹학교라는 일종의 특수한 세계에서 시각장애인의 가치관만 가지고 성장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고, 또 이왕 사회에 나갈 거면 대학 때부터 미리 접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거죠.

입시학원에 다닐 때 헌법을 가르치는 선생님 수업이 엄청 재미있어서 마지막엔 영어 쪽이 아닌 법학부에 들어갔어요.

대학에 들어가니 사람들이 다양했습니다. 유학생은 물론이고 나이가 50대인 사람도 있어서, 하겠다는 마음만 있다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거구나 싶었어요.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는 접근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거, 그건 저의 수영에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죠.

©オフィス写真部 佑木瞬

©オフィス写真部 佑木瞬

패럴림픽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 주기를

일본은 패럴림픽의 인지도나 평가가 아직도 많이 낮습니다. 스포츠 경기라기보다 장애인이 열심히 애쓰고 있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 많죠.

운동 선수로 보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우선 대학 입시 때 절감했습니다. 패럴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것이 유리하게 작용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참작되지 않았어요. 큰 충격이었습니다. 열심히 해 온 수영이 이 정도의 평가밖에 받지 못하나 하는 생각에....... 올림픽이었다면 어땠을까 싶더군요. 하지만 그런 소리를 하고 있어 봐야 소용 없는 일이니 실력으로 들어가 주리라 마음 먹고 재수를 했습니다. 그때는 수영도 안 하고 무조건 공부에만 몰두했죠.

그 다음 번은 취업활동을 할 때였어요. 「우리는 올림픽 아니면 안 뽑아요.」라고 딱 잘라 말하는 회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그 한 회사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예요.

그리고 장애인이 패럴림픽에 대해 모르는 경우도 있어요. 패럴림픽이 아니라 올림픽에 나가고 싶은 거라면 그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런 선수도 있고요. 하지만 몰라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는 거라면 그건 안 되잖아요

올림픽은 텔레비전으로 많이 방송하지만 패럴림픽은 거의 방송되지 않습니다. 뉴스에서조차 별로 다뤄 주지 않아요. 그래서 좀 더 많이 많이 보도해 주시고, 더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런던 올림픽 때는 관중들이 정말 참 훌륭했어요. 어느 경기나 많은 사람들이 보러 왔고, 다른 나라 선수에게도 엄청난 박수와 응원이 쏟아졌죠. 일본에서는 가장 큰 국내 대회 때도 응원해 주는 사람이 전혀 없고, 환호성도 전혀 없어서 대회가 조용해요. 아직도 스포츠로 보아 주지 않고 있다는 증거겠지 하는 생각이 들죠. 2020년이면 도쿄에서 올림픽과 패럴림픽이 개최되는데, 앞으로 7년 동안 제가 런던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패럴림픽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オフィス写真部 佑木瞬

새로운 깨달음

지금은 외국계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늘 해 보고 싶었던 자취 생활도 시작했어요. 부엌칼은 초등학교 때부터 사용해 왔고 중고등학교 때는 조리 실습도 한 적이 있어서 음식은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레퍼토리 없음에 스스로 놀라고 있죠. (웃음)

혼자 살면서 가장 힘든 것은 서류를 작성하는 일이에요. 읽는 것은 컴퓨터 음성출력기로 읽으면 되는데, 쓰는 것만은 회사 사람 등에게 도움을 받아서 하고 있습니다.

회사에 들어오니, 사람들도 다양하고, 하는 일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저도 그중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어요. 전에는 저 자신이 앞에 나서고 싶어 했는데, 이제는 보이지 않는 데서 힘이 되어 주는 일도 좋은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일을 한다는 건, 소박하지만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것이 일을 시작하면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입니다.

지금은 순조롭게 일을 잘 해 나가고 있습니다만, 앞으로 좌절할 것 같은 순간이 온다면 금메달을 따기까지의 8년 동안에 얻은 힘,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강인함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터뷰 2013년 9월


일본국제문화교류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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