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힘
vol.3
미래를 열다
와고 료이치 시인, 후쿠시마 현 거주
2013.04.15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나 쓰나미가 집과 마을을 집어삼키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게다가 후쿠시마에서는 원전 사고까지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지진이 일어난 지 6일째 되는 날, 여진이 이어지는 가운데 방사선의 공포와 싸우면서 후쿠시마에 살고 있던 시인 와고 료이치 씨가 트위터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한 자리 수였던 팔로워의 수가 수만 명으로 늘어났다.
와고 씨에게 말의 힘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어 봤다.
3월 11일에 지진이 발생했고, 다음 날 후쿠시마 원자력 제1발전소의 제1호기에서 수소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이어서 14일에는 3호기에서도 수소 폭발이 일어나, 제가 사는 곳에서는 피난을 가든지 아니면 집 안에만 있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어요. 본진인지 여진인지 알 수 없는 큰 흔들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방사선량계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치를 가리켜, 밖에 나가기는커녕 창문조차 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고 있는 중에 트위터에 제가 무사하다는 이야기를 올렸습니다. 트위터에는 그 이야기만 올리고 말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그때 깨달았습니다. 제가 지금 시를 쓰고 싶어 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다음의 1행을 올렸습니다.
방사능이 내리고 있습니다. 조용한 밤입니다.
지진 후 6일째 되는 날의 일이었습니다. 이날부터 매일 트위터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3개월간 정신없이 몰두했지요. 저의 현재 상황, 후쿠시마의 현재 상황을 알리고 싶다는 일념밖에 없었습니다.
「시의 팔맷돌」이라는 제목으로, 2시간 동안 40회 또는 50회가 넘게 시를 써서 올린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제가 트위터에 쓴 시를 보고 「이건 시가 아니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긴 유치하고 변변찮은 말들이 죽 이어지고 있지요. 지진 이전에는 이미지 중심의 추상적인 시를 썼습니다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재난 상황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자연히 알기 쉬운 말, 잘 전달될 수 있는 말로 바뀌어 갔습니다.
트위터를 통해 말을 되찾다
트위터에 글을 올리기 전 5일간은 말을 잃어버린 상태에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전기도 없고, 가스도 없고, 가솔린도 없고, 물도 없고, 식량도 바닥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아니에요.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인으로서, 교사로서, 아버지로서, 지금까지 나 자신의 언어를 표현해 왔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내가 무력하다는 생각, 나한테는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이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그래도 6일째 되는 날 트위터에 시를 올리면서부터 침식을 잊고 시에 몰두하기 시작했어요. 모두들 차례차례 피난을 떠나고 있었지만, 저 혼자 아파트에 남아 집이 흔들려도 시를 썼습니다. 이때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실감했지요.
그리고 정신없이 시를 쓰는 가운데, 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을 당시의 제 자신이 떠올랐습니다. 읽어 주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그저 죽어라 하고 시를 썼던 20대의 10년.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아무튼지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시를 썼던 그때의 제 모습과 똑같았습니다.
와고 씨의 트위터를 정리한Togetter
http://togetter.com/li/117615?page=1
와고 료이치씨 Website
와고 료이치 씨 낭독 「높은 지대로」
무엇을 표현해야 할지 몰랐던 10대 시절
고등학교 때까지는 시나 문학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고 싶다는 창작 의욕은 강했던 것 같아요. 혼자서 라디오 방송을 흉내 내어 「○○선데이」하는 식으로 제목을 붙이고 테이프에 녹음을 한다든지, 신문을 만들어 집 안에 붙여 놓는다든지....... 그 벽신문은 신문에서 본 재미있는 기사를 오려 모조지에 붙이고, 저의 감상이나 의견을 적어 넣은 것이었어요.
중학교 때는 YMO(Yellow Magic Orchestra)가 너무나 좋아서 나도 음악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악보도 읽을 줄 모르고 악기도 다룰 줄 몰랐어요. 그렇다고 연습하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난 음악은 안 되겠다 싶어 포기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부원이 부족하니 들어와 달라는 친구의 부탁으로 검도부를 그만두고 연극부에 들어갔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뭔가를 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던 거지요.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연극 동아리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진짜 무대에서는 열심히 하면서도, 연습은 영 하기가 싫은 거예요. 연습도 제대로 안 할 거냐고 동료들이 화를 많이 냈습니다.
시와의 만남
음악도 안 되고, 연극도 계속하지 못하고, 다 중간에 흐지부지. 하지만 뭔가를 하고 싶었고 만들어 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교 생협 서점에서 우연히 『현대시 수첩』(월간지, 시초샤)을 보게 되었어요. 투고란의 시를 보는 순간, 「이거다!」 싶은 게 팍 왔습니다. 전위적이고 의미가 불분명한 내용의 시였는데, 굉장히 끌렸어요. 내가 하고 싶었던 게 바로 이런 거였다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지요. 그때부터 흉내를 내어 쓰기 시작했습니다.
시를 쓰니 이번에는 그걸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대학교 정문 앞에서 시를 인쇄한 전단지를 나누어 주었어요. 학생운동 하는 친구가 헬멧을 쓰고 전단지를 나누어 주는 옆에서요. (웃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제 전단지를 받아 주었는데, 강의실로 가다 보니 그게 길가에 버려져 있는 겁니다. 그것도 어떤 것은 발에 밟히고 마구 구겨진 채로 말입니다. 그걸 보면서 「아아, 이게 현실이구나!」하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또 내일은 그렇게 버려지지 않을 시를 쓰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시를 쓰니 이번에는 그걸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대학교 정문 앞에서 시를 인쇄한 전단지를 나누어 주었어요. 학생운동 하는 친구가 헬멧을 쓰고 전단지를 나누어 주는 옆에서요. (웃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제 전단지를 받아 주었는데, 강의실로 가다 보니 그게 길가에 버려져 있는 겁니다. 그것도 어떤 것은 발에 밟히고 마구 구겨진 채로 말입니다. 그걸 보면서 「아아, 이게 현실이구나!」하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또 내일은 그렇게 버려지지 않을 시를 쓰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도 망설임 없이 앞으로 돌진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맞는 말이에요. 계속 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를 만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만났으면 그것을 놓치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이 중요해요.
후쿠시마현립 도서관에서
10년 만에 맞이한 전기
시를 쓰기 시작했던 20대의 10년간, 아무도 읽어 주지 않는 가운데 창작을 하는 고독한 작업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10년째 되는 해에 펴낸 제1시집인 『AFTER』로 나카하라 주야 상을 받고 주변의 인정을 받게 되었지요. 상을 받은 것도 물론 기쁘지만, 저한테는 책이라는 눈에 보이는 형태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굉장히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형태로 구체화가 되면, 그것이 다음 행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시란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시란 인생이다.」 또는 「시는 언어다.」라고 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저한테는 「행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를 쓰고, 그 다음에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지요. 대학교 때는 시를 써서 전단지로 만들어 배포했고, 2011년 대지진 때는 시를 써서 트위터에 올렸습니다.
시를 썼으면, 그 다음에는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전달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시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거든요. 일본은 아직 시의 역사가 짧고, 사회에 필요한 것이라는 인식도 별로 없습니다.
트위터가 만들어 내는 정형시
지진을 겪기 전까지는 우선 트위터나 인터넷 공간에다 시를 쓴다는 것을 생각도 못 했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 언어를 쓴다는 것은 종이 위에, 그것도 세로쓰기로 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트위터는 글자 수가 140자로 정해져 있는데, 그런 틀이 있어서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 전에는 커다란 상자를 만들고 싶었어요. 한 달에 1편 또는 오랜 시간에 걸쳐 긴 시를 쓰는, 그런 작업을 해 왔던 거지요. 2000행짜리 시를 책 하나로 묶은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트위터로는 140자밖에 쓸 수가 없습니다. 작은 상자들을 쌓아 올릴 수밖에 방법이 없는 거지요. 그런데 계속 쌓아 올리다 보면 그게 또 하나의 형태가 되는 겁니다. 작은 상자라서 계속해서 쌓아 올릴 수가 있었던 것이겠지요.
그리고 트위터는 왕복엽서(발신용과 반신용이 같이 붙어 있는 우편엽서) 같은 이미지가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답장을 해 주니까요. 1분이 지나면 리트윗을 해 준다든지 어떤 반응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그 메시지를 읽고 또 다른 것을 쓸 생각을 하게 되지요. 마치 캐치볼 같다고 할까요?
말의 힘
지진이 일어난 후 말과 마주하면서, 말에는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다 들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옛날 일본인의 혼과 마음 그리고 지금의 우리들은 말로 이어져 있어요. 또 우리 모두는 아름답고 평안하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미래를 바라잖아요? 그런 바람을 담아서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미래는 열리지 않으리라는 것, 그리고 말을 아름답게 대하다 보면 틀림없이 거기서 아름다운 미래의 무엇인가를 만나게 되리라는 것, 그런 식으로 시를 쓰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말에는 현재의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모든 것이 들어 있고, 혼이 있고, 빛이 있습니다. 지진이 일어난 후 절망과 슬픔의 시간을 보냈습니다만,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빛을 구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 빛을 깃들이는 것이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의 힘을 믿는 데서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진짜 미래의 이야기를 함께할 수 없습니다. 말이 없으면 그 다음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없어요. 생각하고 있는 것, 느끼고 있는 것을 구체화하지 않으면 미래는 보이지 않습니다. 구체화하니까 그다음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거예요. 이것저것 사람들이 피해 가려고 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원전 문제도 있고,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하지만 피하고 싶더라도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어 말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도 이번 지진을 통해 배운 것이에요.
지금까지 시인은 어떤 문제가 일어나더라도 관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만, 마을을 만들고 사람을 만들고 하는 일에 더 깊이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잘 와 닿는 말, 잘 갈고 닦은 말을 통해서 모두가 서로서로를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시인에게 커다란 역할이 주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40명 가까운 아이들을 모아 후쿠시마에서 개최하고 있는 「시의 서당」에서 감수를 맡고 있는데, 이 「시의 서당」의 목표가 점점 분명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시인으로서 마을 만들기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하는 것입니다.
몸을 관통하는 말
후쿠시마에서 개최하는 「시의 서당」에 참가한 아이들의 시를 읽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은 이번 지진을 몸으로 느낀 아이들이 한 마디 한 마디 진지하게 자기 생각을 엮어 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야기를 할 때 또는 뭔가 생각하는 것을 전달하고자 할 때, 우리는 과연 그 정도까지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자기가 지어 내는 언어에 에너지가 담긴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에 따라, 평소에 말을 고르고 사용하는 태도도 전혀 다르게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 말이라면,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는 것도 말이고 사람을 외면하는 것도 말입니다.
사방에서 몸과 유리된 말들이 사용되고 있어 말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정치가는 말의 힘을 빼앗아 간 책임이 커요. 사회에서 서로서로를 전달하는 것은 말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서로 통하는 말입니다. 시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 서로서로 통하는 말이라는 게 무엇인지 그것을 제시해 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방에서 몸과 유리된 말들이 사용되고 있어 말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정치가는 말의 힘을 빼앗아 간 책임이 커요. 사회에서 서로서로를 전달하는 것은 말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서로 통하는 말입니다. 시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 서로서로 통하는 말이라는 게 무엇인지 그것을 제시해 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