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은 새롭다!
vol.3
'제대로 살아가기'를 다다미에서
마에다 도시야스 마에다 다다미 제작소 대표이사
2019.05
최근에 주거 양식이 바뀌면서 첩표(다다미의 윗면을 덮는 골풀 돗자리)의 일본 내 수요가 1993년의 4500만 장에서 2013년에는 1670만 장으로 20년 사이에 급격히 감소했다. 그러나 다다미 제작회사 사장 마에다 도시야스 씨는 이런 상황을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있다고 한다. 다다미의 장점을 알림과 동시에, 다다미를 통해 '제대로 살아가기'를 제안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2012년부터 재해 지역에 새 다다미를 만들어 보내는 <닷새에 5000장의 약속> 프로젝트를, 전국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꾸려 가고 있다.
가업인 다다미 가게를 이어받은 것은 대학 졸업 후 은행에서 근무한 지 3년이 지난 1995년의 일이었습니다. 가업을 이어받을 생각이 없었고, 돈을 빌리는 쪽이 아니라 빌려주는 쪽에 가는 거라고 잘난 척하면서 아버지께 큰소리치고 은행에 취직했었는데 말이에요. 원래 뭘 만드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 나를 키워 준 가업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졌던 거지요. 하지만 선배나 친구들은 "왜 다다미집이야?" 하더군요. 그런 말이 더 부채질한 측면도 있었지만, 어쨌든 도전해 보고 싶었습니다.
만만치 않았던 첫 출발
다다미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장사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말을 아버지께 수없이 들었기 때문에, 엄청난 각오가 필요하리라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요만큼도 몰랐더라고요. 만만하게 생각했던 거지요. 은행 선배나 여기저기 사람들한테 소개받아 영업을 했는데, 주문이 전혀 안 들어와요.
반년쯤 지나 4조 반짜리('조'는 다다미를 세는 단위) 일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납품을 하고 한 달 후에 수금을 하러 갔더니 그 회사가 없어져 버린 거예요. 그때 진짜 정신적으로 힘들더군요. 그런데 그 일로, 닥치는 대로 한번 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공무점(소규모 건축업자)뿐 아니라 건축 중인 주택이나 료칸(일본의 전통 숙박시설) 같은 곳을 막 찾아다녔어요. 샘플을 수십 가지 들고 다니면서 추천도 하고, 바로 와 주었으면 하면 바로 가고, 밤이나 주말에 오라 해도 물론 그 시간에 가고, 공무점에서 다다미에 대해 알고 싶다 하면 1시간 동안 이야기해 주고....... 이렇게 하다 보니 "재미있는 사람이 있더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소개해 주기에 이르게 된 겁니다. 처음 맡은 일이 망한 덕분에 저만의 방식대로 첫 출발을 하게 됐고, 또 지금이 있게 된 것 같아요.
©中才知弥
다다미의 테두리를 감싸는 첩연. 색과 모양이 다양하다.
©中才知弥
이어받음과 새로운 도전
아버지가 하시던 일은 물론 잘 배웠습니다만,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주문을 받으면 아무리 어려워도 절대 거절하지 않으셨어요. 저도 그런 면을 이어받으면서 또 고객들과의 거리도 더 가까이 좁히고 싶었습니다.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고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요망 사항에 귀를 기울였던 것도 그래서였고, 실제로 그렇게 함으로써 일도 점차 늘어났지요.
전부터 아버지가 만드시던 유도용 다다미도 우리밖에 못 만드는 걸 만들자 싶어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헤이세이(일본 연호로 1989~2019)의 산시로(일본 소설 <스가타 산시로>의 주인공인 유도 영웅 산시로에 빗대어 일컬음)'라 불렸던 고가 도시히코 씨에게 조언을 받아 가며 개량을 거듭했습니다. 그렇게 완성한 것이 '유도 다다미 산시로'예요. 2008년에 전일본유도연맹에 공식 다다미로 등록을 마쳤습니다. 공인을 받으면 전국 대회에서도 사용되지요.
저희 제품 외에 공인을 받은 유도 다다미는 대부분 스포츠용품 회사가 만든 것입니다. 저희는 다다미집이니까 다다미집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해 보자고 생각했어요.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 표면입니다. 유도용 다다미의 표면에는 합성피혁이 사용되는데, 가능한 한 본래의 다다미에 가깝게 만들고 싶었어요.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자연 소재 다다미는 숨을 쉬기 때문에 습기를 빨아들이고 내뱉습니다. 그래서 여름에는 끈적이지 않고 겨울에는 따듯하지요. 그런 기능을 어떻게든 집어넣고 싶어서, 관련 소재를 생산하는 대기업에 부탁하고 협력을 받아 자연 소재 다다미의 기능을 담은 합성피혁을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
표면뿐 아니라 미끄럼 방지 부분에도 저희가 생각하는 요소를 넣고 싶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찾았어요.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도달한 곳이 제가 사는 고베였습니다. 제화 산업이 발달한 고베에, 유도 다다미에 딱 맞는 기술과 소재가 있었던 겁니다. 깜짝 놀랐어요. 제 고향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던 거지요.
©中才知弥
산시로 다다미. 6~8중 구조로 되어 있으며, 주거용 다다미보다 쿠션감이 뛰어나 충격을 잘 흡수한다.
제대로 살아가기
마에다 다다미 제작소의 콘셉트는 <'제대로 살아가기'를 다다미에서>입니다. '제대로'란 대충 하지 않는다는 그런 뜻이지만, 그것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생각을 받아들이면서도 자기가 이랬으면 하는 것을 실행해 나가는 것까지 포함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때도 있을지 모르겠어요. 예를 들어 전에는 마을 자치회에서 설을 준비하며 떡방아 찧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는데, 요즘에는 점점 없어지고 있어요. 저는 그것을 굳이 합니다. 지역 주민들의 유대관계를 끈끈하게 이어 주는 행사이기 때문에 없애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지요.
일상 업무에서도 고객이 어떤 곳에서 어떤 목적으로 다다미를 사용할지 머릿속으로 상상해 봅니다. 남향인지 북향인지, 아이들 방인지 사람이 많이 모이는 방인지, 용도에 따라 추천하는 다다미가 달라집니다. 이런 상상력이 중요하거든요. 기술도 물론 중요하지만,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상상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제대로 일하고 제대로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中才知弥
아이들도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라며
아이들 대상으로 다다미 워크숍을 열고 있습니다. 벌써 15~16년이 되었네요. A4 크기의 작은 다다미를, 다다미 만드는 재료로 만들어 봅니다. 만드는 과정을 옆에서 보고, 완성되었을 때의 성취감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수없이 반복해도 즐겁습니다.
하지만 만들기만 해서는 안 되지요. 다다미가 완성되기까지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관여하고 있는지 알려줍니다. 지금은 클릭만 한 번 하면 무엇이든 원하는 게 도착하는 시대잖아요. 그래서 주변에 있는 것들이 있는 게 당연한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들 알고 있는 다다미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다다미의 구조, 골풀 이야기, 농민 이야기, 아주 아주 많이 이야기합니다. 아마 만드는 시간보다 더 길걸요. (웃음)
이렇게 함으로써 "의식도 못 하고 있던 다다미가 이렇게 만들어지는구나. 그럼 저건 어떤 사람이 어떻게 만든 것일까?" 하고 다다미가 아닌 다른 것들도 상상해 보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밥알 하나 남기지 말고 다 먹어라." 하지 않아도, 농민들이 열심히 쌀농사를 짓고 운송하는 사람들이 멀리서부터 운반해 줘서 지금 여기 있는 거라고 상상하면 자연히 남기지 않고 다 먹게 될 거라고 보는 거지요. 이런 게 바로 '제대로' 사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다미를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하려고 창작 가미시바이(몇 장의 그림으로 설명하거나 공연하는 연극이나 놀이)도 만들었어요. 처음에는 사람들 앞에서 읽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아이들이 바싹 다가와서 들어주고 뒤에 있는 엄마들도 끄덕끄덕하면서 들어주십니다. 물론 아직도 부끄럽고 전문가도 아니지만, 다다미 만드는 사람이 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中才知弥
워크숍에서 아이들이 만든 A4 크기의 다다미. 첩연은 원하는 것으로 고르게 한다.
©中才知弥
창작 가미시바이. 이야기는 마에다 씨가 만들었다.
재해 지역에 새 다다미를 보내다
2012년에 재해가 일어난 지역의 대피소에 새 다다미를 만들어 보내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시작하게 된 계기는 2011년 3월에 일어난 동일본대지진이었어요. 대피소인 체육관의 차가운 바닥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텔레비전으로 봤습니다. 그때 다다미가 있다면 아픔을 좀 덜 수 있지 않을까, 다다미를 보내고 싶다 하는 생각을 한 거지요. 하지만 혼자 해 봐야 보잘것없을 테고, 대피소까지 가져가더라도 되레 여러 사람을 번거롭게 만드는 꼴이 될지도 모르겠고, 그 전에 어디에 연락해야 될는지....... 이것저것 생각하다 결국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럼 움직일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자체와도 의논을 했습니다. 그리고 재해 지역에 가서 대피소 생활을 하고 있던 분들한테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대피소에는 파란 비닐바닥시트가 깔려 있었어요. 만약 그때 다다미가 있었다면 11개월 된 아기 옆에 누워 젖을 물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이런 아기 엄마 이야기도 들었어요. 이런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이건 꼭 해야 되겠다 싶었습니다.
대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도록 하고, 또 나 혼자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하며, 재해가 일어나면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대피소를 관할하는 관공서와 방재협정을 맺으면 좋지 않을까 해서 여러 관공서를 찾아갔는데 일이 잘 안 됐습니다. 그때 함께한 업체가 몇 군데 안 되었고 제공할 수 있는 다다미도 50장 정도였기 때문에, 큰 재해가 일어났을 때는 그걸로 부족하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을 것 같아요.
다들 갖고 있었던 생각
프로젝트 이야기를 꺼내자 거의 모두가 같이 하자고 했습니다.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지요. 현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업체가 홋카이도에서 규슈까지 약 500곳입니다. 재해가 일어났을 때뿐만 아니라 방재훈련에도 참가하고 있어요. 그런 활동을 하다 보니, 협정을 맺게 된 지자체가 160곳에 이릅니다.
이것이 <닷새에 5000장의 약속> 프로젝트예요. 운영 방식은 이렇습니다. 회원은 자기가 제공할 수 있는 다다미의 수를 미리 등록해 놓습니다. 10장도 좋고 1장도 좋고 또 그 숫자가 해마다 달라져도 괜찮아요. 운반에 드는 비용도 자기가 부담하는 거니까 무리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등록합니다. 재해가 일어나면, 재해를 입지 않은 그 지역의 회원이 대피소에 가서 상황을 파악해요. 다다미가 많이 남아 쓸데없이 대피소 공간을 차지하지 않도록, 몇 장이 필요한지 확인해 지자체와 근처 회원에게 알립니다. 그게 첫날이에요. 그리고 이틀째부터는 회원들이 다다미를 만들기 시작하고 사흘째에는 완성, 나흘째에는 운반하고 닷새째에는 도착한 다다미를 그 지역 회원이 받아 대피소에 전달하는 겁니다. 전국 47개 광역지방자치단체 별로 100장 정도를 목표로 시작했기 때문에 5000장, 그래서 '닷새에 5000장'이 된 것입니다.
어쩌다 보니 제가 이 프로젝트 이야기를 처음 꺼낸 사람처럼 됐습니다만, 회원들 모두가 자기 지역에 도움이 되고 싶고 자기 지역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강합니다. 다들 솔선해서 하고 있어요. 그래서 '약속'인 거지요. 약속이란 의무보다도 중한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첫 활동은 2014년 나가노 북부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였습니다. 다다미 40장을 보냈어요. 2015년에는 두 차례, 그리고 2016년 4월에 일어난 구마모토 지진 때는 대피소 40곳에 6000장을 보냈습니다. 이때는 규슈뿐 아니라 주고쿠, 시코쿠, 간사이, 주부, 호쿠리쿠, 고신, 간토에 있는 200~300개 업체의 동료들이 서로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새 다다미를 만들어 구마모토까지 전해 드렸어요.
그리고 전해 드린 후에도 대피소를 돌며 위생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도움 말씀을 드립니다. 다다미는 크기와 규격이 지역에 따라 다른데, 프로젝트 때는 다다미 한 장의 크기를 통일합니다. 그렇게 해야 체육관 같은 곳에 잘 깔 수가 있으니까요. 또 이재민이 다다미를 옮기는 경우도 있으므로 무게도 가볍게 하고, 푹신푹신한 정도도 대체로 비슷하게끔 생각을 모아 개량하고 있습니다.
대피소의 상황을 안 보고 자기 생각만으로 물자를 보내면 일방적으로 '보내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저희는 그게 아니고 그 지역의 동료가 '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요. 그리고 그 동료가 받아서 대피소에 전달하는 겁니다. 정말로 필요한 물자와 타이밍은 재해 지역에서만 알 수 있기 때문이에요. 다다미 업체는 전국 어디나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런 활동을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습니다.
【인터뷰: 2017년 2월】
구성: TJF